작성자:신종근/광명
2박 3일 동안 포항에 다녀 왔습니다.
제가 둘러본 곳은 정몽주유허비각 - 장기(長鬐)읍성 - 장기유배문화체험촌 - 구룡포일본인가옥거리 - 한반도 동쪽 땅끝마을 비석 - 호미곶등대ㆍ등대역사관ㆍ국립등대박물관 - 이육사청포도시비 -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 - 중성리신라비 - 영일민속박물관 - 남미질부성(南彌秩夫城) - 칠포리암각화군(칠포리 456) - 칠포리암각화군(칠포리 201) - 오도리 주상절리 - 냉수리신라비 - 법광사 터 - 냉수리고분 - 기계ㆍ안강지구 전투전적비 - 기계면 성계리 고인돌마을 - 회재 이언적 신도비(神道碑) - 달전리 주상절리 - 북미질부성(北彌秩夫城) - 포항운하와 포항운하전시관 -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 죽도시장 - 일월문화공원 등 입니다.
짧은 답사 후기를 두 번에 걸쳐서 소개합니다. 오늘을 포항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 "포항을 아시나요"
'포항', 언제부터, 무슨 뜻으로 쓰였을까?
포항(浦項)의 '포'는 '개 포(浦)'자로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항'자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항구 항(港)'자를 쓰려니 생각한다. 하지만 포항의 '항자는 '목 항(項)'자를 쓴다. '목덜미'라는 뜻이다. 그래서 '포항'이라는 말은 '갯목', 여기 말로 '갯미기'라는 뜻이 '된다.
'포항'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시기는 1731년(영조 7)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영조 신해년 고을 북쪽 20리에 관찰사 조현명이 포항 창진(倉鎭)을 개설하고 별장(別將)을 설치했다"라는 말이 나온다.
'포항 창진(倉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창진'은 무슨 뜻인가.
산이 많은 함경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 함경도 지방의 백성 구제를 위해 곡식 보관장소의 기능을 한 창고(倉)를 포항에 설치하였다. 옛날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다. 경상도 동해안에서 함경도 동해안으로 다량의 곡식을 나를 수 있는 수단은 배였고 포항은 그 중심에 있었다.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니까 그것을 또 지키는 군사(鎭)들도 있어야 했다. '창진(倉鎭)'은 곡식 창고와 군대가 주둔한 곳을 의미한다.
그렇게 설치한 '포항 창진'은 53년 정도 유지되다가 1784년에 경비 문제 등으로 없어졌다.
당시 포항이라는 지명은 작은 동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내내 현 포항지역은 흥해군, 청하현, 영일현, 장기현 이렇게 네 개의 군(郡)ㆍ현(縣)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항이라는 지명의 등장은 대일항전기(왜정시대, 일제강점기)에 본격화된다.
그전까지 연일군에 속한 조그마한 포항리였을 뿐인데 1914년, 흥해군, 연일군, 장기군, 청하군 이렇게 네 군이 영일군(迎日郡)으로 통합되면서 영일군 포항면이 새로이 생겼다. 그러다가 1917년에는 포항지정면(指定面)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경상북도에서는 김천과 포항 두 곳만이 지정면이 되었다. 지정면은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총독부 특별 예산으로 운영하는 모범지역이라는 말이다. 지정면이 됨에 따라 특혜를 받아서 일제의 상공업과 수산업이 발달하고 발전하게 된다.
포항지정면은 1931년 포항읍으로 승격되고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포항시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영일군과 합쳐질 때 포항시로 시군 통합이 되었다.
포항시의 구(區) 이름으로 북구, 남구가 아니라 북구를 흥해구, 남구를 영일구라고 했다면 지역의 정체성이 훨씬 더 분명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해를 맞이한다'는 영일(迎日)이라는 이름은 포항의 오랜 정체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 영일 즉, 오늘날 포항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동쪽 땅끝은 동해를 가장 먼저 만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나라 내 겨레(1970) 김민기 글, 송창식 곡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어린 항쟁의 세월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앞길에서 환히 비춰나
눈부신 선조의 얼 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 앞에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 호미곶등대
호미(虎尾)반도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호미곶면, 장기면, 구룡포읍, 동해면 일대를 일컫는다.
호미곶은 '장기곶(長鬐串)'이라고 불렀다. '장기'는 긴 말갈기를 뜻하는데, 해안선이 말갈기처럼 길게 돌출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말의 갈기에서 호랑이 꼬리(虎尾)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곶(串)은 바다로 돌출된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키는 말로 반도보다 작은 개념으로 사용된다.
지금 호미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상생의 손'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대표적인 상징물로 여긴다. 하지만 호미곶의 터줏대감은 상생의 손보다 100여 년 먼저 호미곳을 밝혀온 호미곶 등대이다.

▲ 호미곶등대(1908년 제작). 철근없이 벽돌로만 팔각형으로 쌓아 올렸으며 등대의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양식으로 장식되어있다.
호미곶등대에 얽힌 이야기 하나
등대가 완성되고 초대 등대장으로 부임한 사람은 일본 사람 난파(灘波, 난바)였다. 그는 일본에서 살인범으로 기소되었으나 호미곶 등대장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들이 아버지 원수를 갚고자 이곳 호미곳까지 찾아왔다. 한밤중에 등대에 침입하여 칼을 휘둘러 난바를 살해하였다.
쾌응환호 조난기념비
호미곶등대가 건립된 배경에는 아픈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호미곶 일대 해안은 물길이 험하기로도 유명했다. 1908년 등대가 건립되기 1년 전 일이다. 일본동경수산강습소 실습선이 호미곶 앞바다에서 조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을 출항한 쾌응환호(快應丸號, 카이요마루)는 고등어 어업조사를 위해 영일만에 정박하고 있었다.
1907년 9월 9일 태풍이 격심해져 범선인 쾌응환호는 좌초되었고 이 사고로 교사 1명과 학생 3명이 사망하였다. 일본은 등대 건립을 요구해왔다.
국적을 떠나 사고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남의 바다를 자기들 마음대로 침범해와서는 사고를 당하자 우리에게 등대 건립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당시 힘이 약했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예산으로 등대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난된 지 20여년이 지난 1926년, 조난 당시 같은 배에 승선하였다가 살아 남은 동료들이 돌로 만들어진 기념비를 세웠다.

▲ 수산강습소실습선쾌응환조난기념비. ⓒ 『포항의 문화유산』
- 청포도시비

▲ 청포도시비. 이육사 시인은 결핵 요양차 포항포도원에 들렸고 이곳에서 청포도 시상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호미반도 일대인 동해면과 오천읍에 1917년부터 포도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포도주 양조를 목적으로 설립한 삼륜(三輪, 미쓰와)포항포도원은 재배면적이 60만 평에 이르렀다.
민족시인 이육사 시인이 이곳 포항포도원에 요양차 들렸다.
포항의 문화운동가 김대정(80년대 작고)은 “결핵 요양차 포항의 송도원에 머물던 이육사 선생이 찾아와 직접 동해면 도구리의 삼륜포항포도원에 안내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육사는 이후 나에게 포항포도원에서 청포도의 시상을 얻었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시 초안을 잡은 것을 보여 줬다.”고 한다.
- 유배지 장기현
장기(長鬐)는 한양에서 먼 바닷가라는 지형적 특징으로 조선시대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조선 500년 동안 220여 명의 유배객이 장기를 다녀갔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당대 석학들도 유배객 신세로 장기를 찾았다.
우암이 유배를 떠나게 된 것은 1674년에 있었던 제2차 예송논쟁이 원인이었다.
우암은 그의 나이 69세인 1675년(숙종 원년) 정월,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 10일 장기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679년 4월 10일 다시 거제도로 옮길 때까지 장기에 머물렀다.

▲ 장기읍성.
우암이 장기를 떠나고 122년이 지난 1801년(순조 1년) 다산 역시 유배객으로 장기를 찾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라고 알고 있는 천주교 박해사건과 관련이 있다. 다산의 집안은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1800년 6월 정약용을 총애하던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벽파(僻波: 사도세자 죽음을 당연시)의 우두머리였던 김구주의 여동생이었던 정순왕후는 시파(時波: 사도세자 죽음을 동정)의 모든 고관들을 파직시키고, 1801년 1월 11일 서학(西學, 천주교)을 믿다가 적발되면 코를 베고 멸종시키겠다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이때 책롱사건(冊籠事件)이 발생했다.
정약종(정약용의 둘째형)은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 그리고 주진모 신부의 편지 등이 담긴 책 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몰래 옮기려다가 적발되었다. 책롱 속에는 다산의 서찰도 들어있었다. 1801년 2월 26일,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인 이승훈ㆍ정약종 등 6명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를 당했고 다산은 다행히 죽음은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다산은 3월 9일 장기에 도착한다. 하지만 장기에 머무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801년 9월 15일 황사영이 중국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려 한 편지가 조정에 압수당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그해 10월 20일 다산은 장기에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된 후 전라도 강진현으로 옮겨 갔다.
- 말목장성

▲ 구룡포 말목장성. 동쪽, 북쪽, 서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남쪽만 돌로 성을 쌓아 목장을 만들면 말들이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는 천혜의 조건이다. 동해면 흥환리에서 구룡포 돌문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질러 약 7.6km 거리로 축조되었으며 현재도 5.6km가 남아 있다. ⓒ [브레이크뉴스] 포항의 역사, 산·바다, 천연기념물 연결 장기목장성 둘레길 조성
말목장성은 말을 키우기 위해 만든 동을배곶(冬乙背串)목장의 돌 울타리이다. 동쪽, 북쪽, 서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남쪽만 돌로 성을 쌓아 목장을 만들면 말들이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는 천혜의 조건이었다. 동해면 흥환리에서 구룡포 돌문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질러 약 7.6km 거리로 축조되었으며 현재도 5.6km가 남아 있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목장의 규모는 동서 25리, 남북 30리, 둘레 115리로 전국에서 가장 컸다고 한다.

▲ 구룡포 말목장성. 호미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남쪽만 돌로 성을 쌓아 목장을 만들면 말들이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는 천혜의 조건이었다. ⓒ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79.구룡포 말목장성
마필 수의 규모는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 기록에 1,066 필의 말이 방목상태로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한편 울산에 가면 방어진에 남목(南牧)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곳 또한 목장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 목장이란 뜻이다. 장기현 동을배곶(冬乙背串)목장은 북목(北牧)이었다.
'효종실록'에 효종 6년(1655) 경상도 장기현 내에 북목을, 울산에 남목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을배곶목장이 울산 감목관의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목장의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1832년 발간된 『읍지』에 동을배곶목장의 규모는 둘레 70리, 말 548필이 있다고 하였고 1864년의 『고종시대사 1집』에는 울산ㆍ장기 두 곳 목장마가 587필이라는 기록이 있다.
- 구룡포에 남은 일본 제국주의 흔적들
구룡포는 동해안 최대의 어장이다. 대일항전기(왜정시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왔고 당시 유물 또한 많이 남아 있다. 구룡포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유물 답사는 먼저 구룡포항 방파제 옆에 있는 '구룡포항확축공사준공비(九龍浦港擴築工事竣功碑)'이다.

▲ 구룡포항확축공사준공비. 구룡포항 방파제 입구 옆에 서 있다. ◀1935년에 건립 당시 모습. ⓒ『포항의 문화유산』
구룡포에 일본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2년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출어한 도미잡이 어선 50여 척이 구룡포에 정박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인 이주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행정적 변화로 이어졌다.
1913년 10월 11일에는 우편소가 설치되고 시가지 정리도 계획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구룡포리라는 지방행정조직이 등장하게 되었다. 1920년 1월에는 구룡포에도 공설 전통시장이 개설되었다.
1912년경 47호에 불과했던 일본인 이주자들은, 축항(築港)이 한창이던 1932년 5월에는 일본인 262호(9,056명), 조선인 744호(3,388명)가 구룡포에 거주하였다.
이후로도 1942년 구룡포읍으로 승격될 때까지 구룡포지역사회를 주도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구룡포에서 가장 유력한 일본인은, 가가와현(香川県) 출신의 교본선길(橋本善吉, 하시모토 젠기치)과 오카야마(岡山)현 출신의 십하미삼랑(十河彌三郞, 도가와 야사부로)였다.
하시모토는 구룡포에서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도가와는 경상북도 평의원을 비롯하여 구룡포의 각종 공직을 역임하면서 각각 구룡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룡포축항기성동맹회'를 조직하고 회장 도가와, 부회장은 하시모토가 맡았다.
1923년 2월 28일부터 시작한 공사는 1926년 8월 201일, 연장 182m의 방파제 1차 축조를 마쳤다.
이 공사로 구룡포는 어업 근거지의 기본적인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인구도 늘고 항구로서의 기능도 발전하였다.
1932년 2월부터 방파제를 연장하는 2차 축항공사가 시작되어 1935년 2월 13일 완성되었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구룡포 방파제(북방파제)는 이렇게 건립이 되었다.
준공비에서 길을 건너 골목으로 접어들면 보존 상태가 양호한 일본 가옥을 만나게 된다. 교본선길(橋本善吉, 하시모토 젠기치)의 2층 목조집이다.

▲ 구룡포 근대역사관. 하시모토 젠키치의 2층 목조집이었으며 포항시에서 매입ㆍ수리하여 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해 와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지금은 포항시에서 매입ㆍ수리하여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음은 구룡포 중앙에 있는 돌계단 이야기이다

▲ 대일항전기(왜정시대, 일제강점기) 일본 신사(神社)로 올라가던 계단이었다.
돌계단 양옆으로는 사각의 돌기둥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돌기둥의 뒷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의 뒷면에 시멘트로 덧칠해진 흔적을 볼 수 있다. '단기 4293년'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뒷면에는 '昭和九年'이라고 적혀 있다. 즉 돌계단과 돌기둥들이 1944년에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멘트로 덧칠한 것은 무엇을 가리기 위함일까. 돌계단 조성 당시 구룡포 일본인 유지들의 이름들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광복 후 그 이름들을 시멘트로 덧발라 가린 후 기둥을 180도 돌려 세웠다. 그렇게 조성된 것이 구룡포공원이다.
시멘트를 덧발라 지우려고 한 흔적은, 계단을 다 올라 마주하는 비석에서도 발견된다. 일본식으로 만든 기단 위에 규화목 화석으로 높이 세운 비석이다. 십하미삼랑(十河彌三郞, 도가와 야사부로)의 송덕비이다.

▲ 자신의 송덕비 옆에서 사진을 찍은 도가와 야사부로, 당시 포항에서 문인 활동을 하던 세토 가즈요시(瀨戶-由)가 송덕비 비문을 지었는데 시멘트로 덮혀 있어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 『포항의 문화유산』
송덕비에서 몇 계단 더 오르면 구룡포항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편평한 평지가 나온다. 이곳에 현재 용왕당과 충혼각이 있다.
대일항전기(왜정시대, 일제강점기) 때는 신사(神社)가 있었던 곳이다. 돌계단도 신사에 오르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신사를 지을 때 사용되었던 초석(礎石)과 신사를 참배하기 전 손을 씻는 수수사(手水舍, 쵸우즈야)가 있다. 옆면에 '大正二年'(1913)이라 적혀 있어 건설 시기를 알 수 있다.
신사는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는 1956년 용왕당이 건립되었다. 또한 '구룡포충혼각'은 6.25전쟁에 참여한 호국영령을기리기 위해 1960년에 건립하였다.
'충혼탑'도 함께 건립되었는데 이때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이 만들어 놓은 기단 위에 충혼탑 비석만 올려놓은 것이다. 재활용이라고 하지만 명분도 감각도 없었다. 전체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국영령의 넋을 위로하는 충혼탑을 일본인이 만든 기단 위에 올린다는 생각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것도 일본제국을 위해 희생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국재향군인회(帝國在鄕軍人)'가 만든 비의 기단 위에다가 말이다. 신사 터 한쪽에 지금도 기단이 있다.

▲ 일제가 만든 기단부를 재활용한 두 사례. (좌)일본제국 재향군인회 탑 기단부를 재활용한 충혼탑.(사진출처 : 구룡포향토사). (우)포항지구전투전적비.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수상(壽像)에 사용되었던 기단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가 1987년에 전적비 몸체만 같은 형체로 교체하였다. ⓒ 『포항의 문화유산』
일본인이 만든 기단 위에 세워진 충혼탑은 결국 철거가 되고 2007년 새로이 충혼탑이 만들어졌다.
일제가 만든 기단부를 재활용한 사례는 포항 시내에서도 발견된다. 송도해수욕장 입구에 나란히 있는 '미 해병 제1비행단 전몰용사충령비'와 '포항지구전투전적비'이다.
1952년에 설립된 '미 해병 제1비행단 전몰용사충령비'는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군 충혼비였던 것을 재활용하였고
1959년에 설립된 '포항지구전투전적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수상(壽像)에 사용되었던 기단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가 1987년에 전적비 몸체만 같은 형태로 교체하였다.
- 동해안별신굿
포항의 무형유산 중 빠트려서는 안될 것이 '동해안별신굿'이다. 흔히 굿이라고 하면 미신 정도로만 여길 뿐 그 안에 담긴 의미나 행해지는 행위의 예술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바다를 끼고 어업에 종사하던 옛 사람들에게 바다는 풍요의 존재기도 하였지만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자연스레 풍어를 기원하고 안녕을 비는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는 신앙이 되기도 하였고 마을 축제 성격의 연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민족의 오래된 정서나 우리 음악의 원형(原型)을 굿에서 찾을 수 있는 이유이다.
굿을 하는 무당은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로 나뉜다.
강신무는 신내림을 받은 무당을 말하고 세습무는 부모가 무당인 경우 자식이 무당이 되는 경우인데 부모로부터 노래와 음악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익히게 되다 보니 음악성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별신굿은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불려지며 서해안과 제주도 바닷가에서도 다양한 이름의 풍어제가 행해졌다. 별신이라는 말은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의 의미가 강하다. 마을의 무사와 풍농, 여행자의 사고 방지는 물론, 마을 사람들의 화해와 소통 등 마을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다보니 유교식의 마을 동제보다도 연희성과 오락성이 더해져 자유분방한 마을 축제의 성격이 강하다.
동해안별신굿은 강원도 거진에서부터 부산 동래까지 100개가 넘는 어촌마을에서 행해져왔다. 그런데 유독 포항의 문화유산에 동해안별신굿을 포함시키는 이유는, 그 별신굿을 행하는 무속인 집안의 중심이 포항이었기 때문이다

▲ 3대째 김해김씨 무계 3형제. 좌로부터 김재출, 김호출, 김석출. ⓒ 『포항의 문화유산』
그중 가장 유명했던 이가 김해 김씨 무계의 김석출이다. 동해안별신굿이 1985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을 때 김석출은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흔히 인간문화재가 되었다고 한다. 조부인 김천득에서부터 부친인 김성수, 그리고 삼형제인 김호출, 김석출, 김재출 모두 고향이 포항이다.
김석출 또 그의 딸 김영희, 그의 조카 김용택, 이들의 고향이 다 포항인데도 아이러니한 것은 동해안별신굿이 부산 기장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 젊은 땅, 포항
주상절리
우리나라 지각의 43%가 시ㆍ원생대라는 지질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땅이다. 시ㆍ원생대는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40억 년 이상을 차지했던 긴 지질시대다. 그런데 포항은 2,300만 년 전부터 퇴적된 신생대 제3기 층이 분포한다. 지구의 나이 46억 살에 비해 포항의 나이는 1억 살의 반의 반도 안 되는 0.23억 살이라고 보면 얼마나 젊은지 상상이 될듯하다. 이런 신생대 제3기 층이 우리나라 전체면적의 4.8%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포항에는 신생대 제3기보다 더 젊은 신생대 제4기에도 땅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포항은 특별한 땅이다.
신생대 제3기 마이오세(Miocene Epoch)라는 지질시대에 지각의 당기는 힘으로 동해가 만들어졌다. 동해 탄생의 영향으로 포항의 지각이 갈라져 낮아지게 되고 여기에 토사가 퇴적되어 퇴적암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질학에서는 포항분지라고 부른다.
동해가 열릴 때 장기(長鬐)도 포항처럼 지각이 갈라져 가라앉아 낮은 땅이 되고 퇴적층이 쌓이게 되었다. 지질학에서는 장기분지라고 부르며, 뿐만 아니라, 장기분지는 포항분지보다 상대적으로 화산활동이 활발했었다. 화산활동과 관련된 독특한 지형이 장기면에서 구룡포읍, 호미곶면, 동해면 임곡리에 이르는 호미반도 해안에 분포한다.
마그마나 용암이 분출하여 냉각될 때에는 수축이 일어나서 틈이 생기게 된다. 이 틈을 절리(joint)라 하며 단면이 다각형 형태를 가지는 길쭉한 기둥 모양의 절리를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라고 한다.
오도, 조물주가 정성을 들였으니
주상절리는 호미반도 뿐만 아니라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에서도 발견된다. 오도는 섬 모양이 까마귀 머리 같다고 오도(鳥島)라고 이름 지어질 정도이니 섬 전체 색깔이 검은색이다.

▲ 오도는 여러 방향의 주상절리를 관찰할 수 있어서 마치 주상절리 백화점 같다. ⓒ 『포항의 문화유산
해안가에서 볼 때는 하나의 바위섬 같지만 가까이 가보니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은 돌기둥이 통나무 장작을 쌓아 놓은 듯 개나리봇짐을 포개놓은 듯 돌로써 빚어진 풍경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신기했다. 또 해면에 수직 방향으로 굳어진 주상절리의 단면들은 벌집 모양처럼 그 어느 인공 타일보다도 정교해 보였다. 이렇게 수평으로 또 수직으로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어서 오도는 주상절리 백화점 같다.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과 같은 화산암에서 형성되는 육각기둥 모양의 돌기둥을 의미한다.
달전리 주상절리는 높이 약 20m, 길이 약 100m의 큰 규모를 가진다. 뚜렷한 육각기둥이 잘 발달한 이곳에서는 용암이 식어 주상절리가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또한 달전리 주상절리의 현무암은 한반도와 붙어있던 일본이 잡아당기는 힘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동해가 형성되었을 때 만들어졌다. 잡아당기는 힘은 이곳 달전리에도 영향을 주어 땅이 벌어지게 되었고, 벌어진 틈을 따라 땅 속 깊은 곳에 있던 마그마가 솟아오르면서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달전리 주상절리는 주상절리 그 자체뿐만 아니라 동해열림의 환경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지질학적 가치가 높다.
- 포항의 젖줄, 형산강
3호(湖) 5도(島)의 고장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에서 발원한 형산강은,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경주시 부근에서 지류인 남천ㆍ북천 등을 합류하여 경주평야를 형성하고, 경주시 안강읍 부근에서 기계천과 합류하며 안강평야를 형성한다. 여기서 유로(流路)를 동북동으로 바꾸어 형산제산지협(兄山弟山地峽)을 지나 영일만 내의 삼각주성 충적평야인 포항평야를 형성하고 동해로 유입된다.
형산강에 의해 이루어진 퇴적층은 강의 흐름에 따라 때론 연결되었다가 또 때론 섬으로, 호수로 남곤 하였다. 칠성천, 양학천, 학산천, 두호천 등 많은 샛강들이 도심을 흘러 형산강으로 합쳐졌다. 포항 구도심 지역 이름에 '섬 도(島)'자가 유독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해도, 상도, 대도, 죽도 등 이들 지역은 한때는 이러한 샛강에 의해 나뉘어진 섬들이었다. 죽도 다리, 해도 다리 등 섬을 잇는 크고 작은 다리 또한 많았다.
만약 지금까지 도심에 강들이 흐르고 걸으면서 건너갈 다리가 여러 군데 있다면 무척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을 테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못했다. 도로를 넓히고 주차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더 급했다.
도심을 흐르던 샛강들은 1985년부터 복개공사가 점차 이루어지고 다리는 쓸모를 잃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섬이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항은 '3호(湖) 5도(島)'라는 말이 있을 만큼 '강(江)의 도시'였다.

▲ 포항진지도(1872) 부분. 죽도(竹島), 해도(海島), 상도(上島), 하도(下島), 분도(分島) 다섯 개의 섬이 보인다.
'3호'는 두호(斗湖), 환호(環湖), 아호(阿湖), 세 개의 호수를 말한다. 물론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호수 이름은 포항 북구의 동이름으로 남아있다. 두호동, 환호동, 그리고 아호는 항구동이 되었다. 이들은 포항 북구의 해안가 지역이다. 그러니까 해안가에 큰 호수가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강의 하구에 생기는 석호(潟湖, lagoon)이면 설명이 된다. 석호는, 강이 운반해 온 모래가 쌓여 바다와 하천을 분리시키면서 강하구에 생긴 호수를 말한다. 퇴적물이 계속 쌓이면서 석호는 자연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데, 두호와 환호, 아호는 자연적으로든 혹은 인위적으로든 사라지고 없다.
'5도'는 죽도(竹島), 해도(海島), 상도(上島), 하도(下島), 분도(分島) 다섯 개의 섬을 말한다. 죽도동, 해도동, 상도동에 그 이름이 남아있고 하도와 분도는 합쳐서 대도동이란 이름이 되었다.
- 포항운하
포항의 물길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포항운하이다.
형산강 하구에 이르러 물의 흐름에 따라 강 주변 지형은 섬으로 나뉘어지기도 하고 뻘밭으로 존재하기도 하였다.
형산강은 북쪽과 남쪽, 두 군데를 통하여 영일만 바다로 유입한다. 각각 북하구와 남하구이다.

▲ 형산강이 포항시내를 지나며 동빈내항을 이루고 영일만으로 흘러들고 있다. 아직 포항제철이 건립되기 전의 모습이다.(1967) ⓒ 『포항의 문화유산』
그러던 것이 남하구 쪽으로만 형산강을 흐르게 공사를 하면서 남하구는 강폭이 넓어졌지만 북하구로 흐르던 물의 양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해도동 일대를 매립하면서 강으로 연결되던 북하구와 남하구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 포항운하 이전. ⓒ 『포항의 문화유산』
송도를 안으로 휘감고 흐르던 물줄기는 송도교 남쪽으로는 매립되어 볼 수 없게 되었고 송도교 북쪽으로 남은 물줄기는 동빈내항을 이루고 항구동에 위치한 북하구를 통해 영일만 바다로 흘러나갔지만 물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곳곳이 썩고 악취가 나는 등 오염이 심했었다.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막혔던 형산강과 동빈내항을 잇는 환경복원사업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이어졌다. 물길 총길이 1.3km, 폭 15~26m, 수심 1.74m의 포항운하가 탄생하였다.

▲ 포항운하 이후. ⓒ 『포항의 문화유산』
몇 가지 문제점이나 한계는 있었으나 막힌 물길이 연결된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오염된 동빈내항의 수질이 개선되었으며 해도동에 수변공간이 조성되고 조각물들이 설치되었다. 크루즈를 타고 동빈내항을 거쳐 영일만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포항운하는 미완이다. 물길은 복원되었다고 하나 시민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는 않다. 운하 주변으로 정주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지역인데다 운하를 일부러 찾을 만한 시설이 취약한 탓이다.
- 저수조가 있는 수도산
수도산은 포항도심에 있는 높지 않은 산이다. 수도산은 무슨 뜻일까.
수도산의 '수도'는 상수도의 의미이다. 지금도 수도산 중턱에 가면 '저수조(貯水槽)'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저수조는 물을 저장해두는 큰 수조를 말한다. 학천계곡에서 끌어온 물을 수도산 이곳 일대에 저장하였다가 산 아래 포항 도심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니까 학천계곡은 수원지가 되고, 수도산 일대는 배수지가 되는 것이다.

▲ 대일항전기(왜정시대, 일제강점기) 수도산. ⓒ 『포항의 문화유산』
대일항전기(왜정시대, 일제강점기) 때 포항 시내가 점점 발전하면서 1923년부터 상수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 1926년에 수도산에 건립된 저수조 건물은 포항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이다. ⓒ 『포항의 문화유산』
당시 물을 저장하던 큰 수조는 남아 있지 않지만 1926년에 건립된 저수조건물은 현재도 있어 포항도심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이다. 출입문 상단에는 '수덕무강(水德无疆)'이라는 한문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물의 덕은 크나 커서 그 지경이 없다.'라는 뜻이 되겠다. 재미있는 것은 글씨 옆에 글을 쓴 사람 이름이 훼손되어 있다. 포항지역학연구회 연구위원 김진홍에 따르면, 훼손된 이름은 3대ㆍ5대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라고 추정하였다.
출처:
1.『포항의 문화유산』 , 이재원, 2023년
2.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79.구룡포 말목장성 < 기획 < 기사본문 - 대경일보 - https://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1919
3. [브레이크뉴스] 포항의 역사, 산·바다, 천연기념물 연결 장기목장성 둘레길 조성 - https://m.breaknews.com/a.html?uid=576222%C2%A7ion=sc5
2026.01.13 22:34
2026.01.13 22:34
포항의 젖줄 형산강 물결 위로
밤새 비춰주는(포철에서 제공하는) 색색의(빨.파,초.노.보라) 기둥형 불빛이 예쁜 기억으로 있습니다.
포항이라는 도시의 지리적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이육사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결핵 요양차 들렀던 요양원에서 "청포도"라는 시의 초안을 그렸다는, 몰랐던 얘기가
애잔하게 들려옵니다
(이육사 시인을 좋아해서 핸드폰 번호를 선택해서 받을 당시 끝번호를 수인번호로 받았지요
0264)
신종근 선생님!
다른 곳에서 뵙다가
이 곳에서 다시 또 글로 만나니 반갑습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필력이 있으신 선생님의 글솜씨로 장문의 길이를 조금만 줄여주세요. ㅎ
더하여
'우리얼' 답사기행문을 올려주시면 금상첨화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얼' 답사길에서도, 가끔씩이라도 뵈면 좋겠습니다.
긴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2026.01.13 22:35
포항의 젖줄 형산강 물결 위로
밤새 비춰주는(포철에서 제공하는) 색색의(빨.파,초.노.보라) 기둥형 불빛이 예쁜 기억으로 있습니다.
포항이라는 도시의 지리적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이육사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결핵 요양차 들렀던 요양원에서 "청포도"라는 시의 초안을 그렸다는, 몰랐던 얘기가
애잔하게 들려옵니다
(이육사 시인을 좋아해서 핸드폰 번호를 선택해서 받을 당시 끝번호를 수인번호로 받았지요
0264)
신종근 선생님!
다른 곳에서 뵙다가
이 곳에서 다시 또 글로 만나니 반갑습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필력이 있으신 선생님의 글솜씨로 장문의 길이를 조금만 줄여주세요. ㅎ
더하여
'우리얼' 답사기행문을 올려주시면 금상첨화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얼' 답사길에서도, 가끔씩이라도 뵈면 좋겠습니다.
긴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2026.01.13 22:35
@김명숙(천마산시인) 네, 반갑습니다.
ㅋㅋ 제가 필력이 모자라서요. 후기를 줄이는 게 쉽지 않네요. 아직 초보자라 그렇습니다. 이해 부탁합니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몇 년 후 초보자 티를 벗어나면 조금 나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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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를 방문했을때 일본인이 이 관리사에 살고계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원래 이 구룡포에서 태어났다가 1945년 일본 카가와로 귀환한 다음 죽 일본서 살다가 이곳 고향인 구룡포를 못잊어 돌아온 분이더군요...
구룡포는 일제강점으로 역사가 시작된 곳이 아니고 일본내에서 어장을 찾지못해 배를 타고 여기까지 넘어온 시코쿠(四國)의 카가와(香川) 및 도쿠시마(德島) 어민들이 흘러들어와 개척된 곳이란 특수한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그들은 이 땅과 바다를 조선인들에게 얻어쓴다는 순박한 생각을 해서인지 일제시대때도 강압적인 모습이 적었고 지금까지도 교류를 하며 살고있다고 들었습니다...